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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황석산성 전투 (함양) - 황석산성 전투 끝까지 결사 항전

by trekking-trails 2025.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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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산성 전투 (함양)

 

 

정유젤란 당시 일본군의 북상저지 일본군의 항복 거부와 결사 항전 수만에 달하는 민간이 전멸 도주한 사령관의 처벌을 둘러싼 논쟁

황석산성은 경남 함양군에 있는 해발 1190m에 달하는 황석산 정상 근처에 쌓인 산성이다. 이 산성에서 정유재란 당시 수만명의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에 격렬한 격전이 이뤄졌다. 대대적인 공세에 나선 일본군을 맞아 마지막까지 항전한 황석산성의 전투 결과는 국가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새벽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 당시 조선사회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정유재와는 발발, 목표는 전라도 황석산성은 경상남도 거창으로 60령을 넘어 전주로 떨어지는 영호남의 관문으로 전체 산성 길이는 2750m, 높이는 3m 정도로 정상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을 따라 계곡을 감싸도록 쌓은 산성이다. 당시 함양에 거주했던 성비정경은은 자신의 저서 고대록에 황석산성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성이 험한 것은 하늘이 만든 것이다. 만약 수년간 먹는 군량만이 비축되어 있다면 왜노(일본)와 충돌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로 했다.

부산을 침공,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조명연합군과 오랜 협상이 실패로 끝나면 정유년에 총 14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재침공을 한다. 1차 침공이 서울을 함락하고 조선 항복을 받는 것이 목표라면 2차 침공은 전라도로 진격해 조선 남부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당시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은 조선정벌이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의 남부지역을 할양되기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등 남부지방에 근거지를 확보하려고 했다. 일본군은 가장 먼저 남해안의 7천량으로 원균의 조선수군을 대파하고, 육지에서는 전라도 남원과 전주를 공격하는 두 가랑이의 진격로를 택했다. 전주를 공격하는 일본군 우군은 모리 히데모토를 대장으로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구로다 나가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등이 가세했다. 우근은 울산 서생포에서 출발해 양산과 밀양을 거쳐 합천, 거창과 함양으로 진군했다. 남원을 공격한 코니시 유키나가의 좌군과 전주에서 합류한다는 계획이었다. 조선군은 기요노 전술에 맞았다. 황석산성을 비롯한 남부의 주요 산성을 재정비하고 거기에 주민과 식량 등의 물자를 집결시켜 방어전을 펼쳐 적의 보급과 진격을 어려워 하는 작전이다. 조선은 황석산성을 일본군이 반드시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인근 거창, 안음, 함양 등 미사토의 군사를 배치해 안음 현감 곽준에게 지키도록 했다.

 

◇시간 다가오던 황석산성 황석산성은 재침에 대비해 개·보수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조카가 황석산성에 가서 성을 쌓는 것을 감독했다. 성의 쌓기가 지금의 급무라고는 하지만, 6월에 노동자를 동원하는 것은 어떨까"

고대의 날 자에는 농사철에 사람들을 동원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성을 쌓는 것은 아직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적의 소식은 서둘러 들려온다」(고대의 자)

“가토 기요마사(가토 기요마사)가 니시이우라(울산)에서 서쪽으로 전라도에 들어가 행장(코니시 유키나가)과 함께 미나미하라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원수(권률) 이하가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쳤다”

전방 방어선이 속속 무너지자 충격은 컸다.

 

"벽견, 악견, 정견 등 세 가지 산성을 모두 버리고 지키지 않기 때문에 정말 슬퍼했다. 사람들이 놀라서 흩어져 모두 성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뛰어난 장수가 있어도 국가를 위해 어려울 것이다"

“의병장인 곽재만만이 창녕의 화왕산성에 들어가서 죽을 것을 기도하고, 왜적들은 산성 아래로 이르러 산성의 형세가 험하고 성 안의 사람들이 조용히 움직이지 않고 지키는 것을 응시해서는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진빌록)

조선왕조실록에는 “곽재우는 임진년 이후 정진을 지키고 화왕산성을 지킬 때는 파진하라는 격문이 전해진 뒤 처음 나왔다”고 썼다. 화왕산성을 우회한 일본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함양 일대 주민들은 서둘러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황석산성에 들어가는 대신 근처의 계곡과 산에 숨었다.

 

“북면에 가서 길에서 (황석) 산성 소식을 들었는데 매우 허무하다는 것이었다.

고대 리스트를 쓴 정경은 본인도 가족과 황석산성에 들어가지 않고 인근 백운산 등에서 피난했다. 황석산성은 곽준과 조종도, 백살림 등이 이끄는 수백여 명의 조선군과 그 가족, 일단 주민들이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일본군은 안음에, 16일에는 함양까지 밀려들어 산성을 포위했다. 난중잡록, 국방부 전사 편찬위원회 등의 자료를 보면 성을 감싸기 위한 일본군은 “성을 비워두면 추격하지 않는다”며 성 속 곡물을 건네주는 것을 회유했지만 조선군과 백성이 이를 거부하면서 전투가 불가피해졌다고 설명했다. 조선군의 기요노 전술에 의해 군량미 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일본군은 약탈에 집중했다. 일본군은 산성 주변에 많은 피난민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 황석산성을 감싸는 16일부터 산성에 대한 공격과 주변 지역 일대에 대한 학살과 약탈을 동시에 진행했다. 황석산성의 남쪽은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서쪽은 나베시마, 동쪽은 구로다의 군대가 각각 진을 쳤다. 그들의 규모는 적어도 2만명 이상으로 보고 있다. 하편은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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